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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욕은 언어의 그림자일까? 비속어의 정의와 언어적 역할
‘욕’은 언제나 혀끝에 맴돌지만,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분위기가 달라진다. **비속어(slang, profanity, expletive)**는 사회적으로 부적절하다고 여겨지는 표현이며, 주로 감정 표현이나 긴장 완화, 공격성 표출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그런데 놀라운 건, 욕은 단순한 비문법적 발언이 아니라, **언어학적으로도 체계적인 규칙을 따르는 ‘언어의 하위 장르’**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씨-”로 시작하는 단어는 어원을 추적해보면 고대 게르만어의 분변 관련 단어에서 유래했으며, 지금도 영어에서 ‘s-word’로 통용된다. 한국어의 ‘개’로 시작하는 욕설 역시, 동물 이름과 부정적 감정을 결합한 구조를 지닌다. 즉, 욕은 문화마다 다르게 발전했지만, 그 형식과 사용 방식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한다.
더 흥미로운 점은, 사람들은 분노할 때 의식적으로 욕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가장 강한 감정 단어를 꺼낸다는 것이다. 이는 욕이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신체적 반응과 연결된 감정의 언어라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뇌 과학 연구에서는 욕설이 뇌의 언어 영역이 아닌, **감정과 반사 행동을 관장하는 편도체(Amygdala)와 기저핵(Basal Ganglia)**에서 활성화된다는 결과도 있다.2. 고대 문명에도 욕이 있었다: 인류 최초의 욕설 기록들
욕이 현대 사회의 일탈 현상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고대 문명에서도 욕은 존재했고, 때로는 문학, 재판 기록, 심지어 왕실 문서 속에도 등장했다. 욕은 그 시대 사람들의 감정, 가치관, 사회 구조를 반영하는 문화적 거울이었다.
가장 오래된 욕의 기록 중 하나는 기원전 1900년경 수메르어 점토판에서 발견된다. 이 문서에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어머니를 비하하는 문장이 쓰여 있었다. 지금의 ‘엄마 욕’과 유사한 표현이다. 고대 이집트 문헌에서는 정치적 풍자와 욕설이 섞인 시가가 발견되었고, 로마시대 그라피티에서는 거리의 벽에 적힌 외설적 표현과 조롱의 문장들이 대중의 감정을 대변했다.
중세 유럽에서도 욕설은 성경과 법률로 금지되었지만, 서민들은 구어체 속에서 ‘지옥’, ‘악마’, ‘배설물’과 관련된 단어를 이용해 강한 표현을 만들어냈다. 예를 들어, 고대 영어의 ‘zounds(=God's wounds)’는 신의 상처를 언급하며 신성모독을 표현했던 욕설이다. 이처럼 욕은 금기를 건드릴수록 더 강력한 감정 전달 도구로 작동했다3. 비속어는 단지 ‘나쁜 말’일까? 사회적 기능과 심리학적 효능
욕을 부정적인 말로만 본다면, 그 이면의 복잡한 사회적 작용을 간과하게 된다. 욕은 분명히 공격적이고 자극적인 단어지만, 동시에 사회적 긴장 해소, 집단 소속감 강화, 감정 해방 기능을 수행한다.
예를 들어, 스포츠 팀원들이 “야, 이 XX야!”라고 소리치며 웃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이는 상대방을 모욕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친밀함을 드러내는 ‘친구 욕설(friend insult)’의 예다. 특히 남성 문화에서는 욕이 남성성(masculinity)을 상징하는 일종의 코드로 작용하기도 한다. 군대, 운동선수, 공사현장 등 특정 집단에서는 욕이 사회적 유대감을 표현하는 언어적 장치로 쓰인다.
또한 욕은 실제로 고통을 줄이는 효과도 있다. 2009년 영국 킬 대학의 연구에서는,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근 참가자들이 욕설을 외칠 때 고통을 더 오래 견디는 결과가 나왔다. 이는 욕이 단지 언어가 아니라 심리적 방패 역할도 수행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물론 모든 상황에서 욕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공적인 자리, 성별·연령 간의 상호작용에서는 욕이 폭력적 언어로 인식되며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욕은 ‘표현의 자유’와 ‘사회적 규범’ 사이에서 언제나 아슬아슬한 경계를 걷는 언어라고 할 수 있다.4. 디지털 시대의 욕설은 진화 중이다: 인터넷 비속어와 새로운 코드
욕은 시대와 기술의 변화에 따라 형태와 전략이 달라지고 있다. 특히 디지털 환경에서는 비속어가 훨씬 더 빠르고 창의적으로 진화하고 있다. 예전에는 방송에서 ‘삐-’ 처리되던 단어들이, 요즘에는 별표(*), 자음만 표기하기(ㅈㄴ, ㅂㅅ), 영어 대체(F-word), 밈(Meme) 기반의 우회 표현 등으로 무수히 파생된다.
예를 들어, “헐 개웃겨 ㅋㅋ”라는 말은 표면상 욕설이 없지만, ‘개’라는 접두사는 강조형 욕의 흔적을 비표준적으로 사용한 예다. 또 “현웃(현실 웃음)”처럼 짧은 신조어는 감정 표현을 줄이면서도 언어적 맥락을 함축적으로 담는 능력을 보여준다. 이런 표현들은 검열을 피하면서도 감정은 최대한 전달하려는 언어 전략이다.
더불어 욕은 이제 문화 콘텐츠로도 소비된다. 유튜브 콘텐츠, 웹툰, 스트리밍 방송 등에서는 욕이 ‘리얼함’과 ‘개성’을 표현하는 언어 도구로 작용한다. 일부 크리에이터는 특정 욕 표현을 트레이드마크처럼 사용하며, 팬들은 이를 팬덤 문화의 일부로 소비한다.
그러나 디지털 욕설은 사이버 불링, 혐오 발언, 인격 모독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그 경계가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표현의 자유를 넘는 순간, 욕은 언어 폭력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디지털 시대의 욕은 ‘어떻게 욕하느냐’보다 ‘왜 욕하느냐’를 묻는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언어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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