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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숫자와 언어의 관계에 대한 통념 깨기
인류 문명은 수천 년 전부터 수를 사용해 세상을 이해하고 구조화해왔다. 숫자는 상거래, 시간 측정, 공간 계산 등에서 없어서는 안 될 개념이며, 대부분의 언어에는 수사(numerals)라는 형태로 수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식은 전 세계 모든 언어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언어학자들은 숫자를 사용하지 않거나, 아주 제한된 수 개념만을 가진 언어 공동체를 발견해왔다.
이러한 언어들은 숫자 없이도 일상생활을 유지하며, 수 개념을 사용하는 다른 문화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기술한다. 본 글에서는 숫자가 없는 혹은 제한적인 수 체계를 가진 언어들의 특징을 소개하고, 이들이 숫자 없이 어떻게 사고하고 소통하는지를 다양한 사례를 통해 탐구하고자 한다.2. 피라하어(Pirahã): 숫자가 없는 대표 언어의 사례
브라질 아마존 지역의 피라하(Pirahã) 부족이 사용하는 피라하어는 숫자가 전혀 없는 언어로 가장 자주 언급된다. 이 언어는 전통적인 수사 체계를 가지지 않으며, ‘하나’, ‘둘’, ‘많다’에 해당하는 대략적인 표현만이 존재한다.
정확한 수 표현의 부재
피라하어에는 ‘1’, ‘2’, ‘3’ 같은 명확한 숫자가 없으며, 대신 상대적인 양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수를 대체한다. 예를 들어, ‘호이(hoí)’는 ‘작은 수’나 ‘하나 정도’를 의미하고, ‘호이호이(hoí hoí)’는 ‘조금 많다’, ‘바지아이(baagiso)’는 ‘많다’는 정도의 개념이다. 이들은 절대적인 수량을 나타내기보다는, 상대적 비교나 경험적 판단에 기반해 수량을 파악한다.
인지적 실험 결과
언어학자 다니엘 에버렛(Daniel Everett)의 연구에 따르면, 피라하 사람들은 숫자를 외부에서 학습하려 해도 정확히 기억하거나 사용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예: 실험에서 8개의 물건을 배열해두고 같은 수의 물건을 맞춰보도록 했을 때, 피라하 화자는 대체로 3개 이상이 되면 정확한 수를 판단하지 못하고 ‘많다’는 개념으로만 응답했다.
문화적 배경과 언어 구조의 연결
피라하어의 이러한 특성은 이들의 문화가 현재 중심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에만 의존한다는 점과 연결되어 있다. 추상적인 수 개념은 필요하지 않으며, 언어도 그에 맞게 최소화되어 있는 것이다.
피라하어는 수 개념이 보편적이라는 통념에 도전장을 내미는 대표적인 사례로, 언어와 인지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만든다.3. 수 개념이 제한된 언어들: ‘1, 2, 많다’의 세계
숫자가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수 개념이 매우 제한된 언어도 존재한다. 이들은 대부분 수사를 2나 3까지만 가지고 있으며, 그 이상의 수량은 모호한 표현으로 처리한다. 이러한 언어들은 ‘많다’라는 개념을 숫자 이상의 모든 양에 적용하며, 이는 그들의 인지 방식과 삶의 방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문다어(Munduruku)
브라질의 또 다른 부족인 문다어 사용자는 5 이하의 수만 명확히 구분할 수 있으며, 그 이상의 수는 대략적인 추정으로 표현한다. 실험에서 문다어 화자들은 ‘4개’와 ‘5개’는 구분했지만, ‘7개’와 ‘8개’는 구분하지 못하고 비슷한 수로 인식하는 경향을 보였다.
월프리어리어(Warlpiri)
호주 원주민 언어 중 하나인 월프리어리어도 숫자 표현이 1과 2만 존재한다. ‘3 이상’은 단지 ‘많다(many)’로 분류되며, 이를 통해 그들은 사냥, 도구 제작, 공동체 협업 등 모든 활동을 수행한다. 이는 숫자가 없이도 기능적인 사회생활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언어적 전략으로서의 비수적 표현
이들 언어는 숫자를 대신해 ‘짝수/홀수’, ‘큰/작은 무리’, ‘하나의 묶음’ 등의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절대 수량보다 상대적 크기나 맥락적 판단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인지 구조를 반영한다.
이처럼 제한된 수 개념은 특정 문화에서는 효율적인 정보 전달 방식으로 작용하며, 수 개념 자체가 언어와 문화에 따라 다양하게 구성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4. 수 개념 없는 언어가 주는 언어학적, 인지학적 시사점
숫자 없는 언어는 단지 언어적 희귀성이 아니라, 인간 인지의 유연성과 문화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이러한 언어들은 수 개념이 선천적이지 않으며, 문화와 필요에 따라 형성된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수 개념의 상대성
서구 사회에서는 수 개념을 생득적이거나 보편적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지만, 피라하어와 문다어 같은 언어들은 숫자가 학습된 개념임을 보여준다. 이는 사피어-워프 가설(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의 중요한 근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교육과 수 개념 발달의 관계
언어에 숫자가 없다는 것은 수학적 사고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수 개념의 발달에는 언어적 표현뿐 아니라 교육, 문화, 경제 활동 등의 총체적인 맥락이 필요하다. 피라하 부족이 상업 교류를 확대한다면, 그들의 언어에도 숫자가 도입될 가능성이 있다.
인간 사고의 다양성
수 개념이 없거나 제한된 언어는 ‘문명화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인간 사고가 수 없이도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정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즉, 인간의 사고는 언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언어는 단지 도구가 아니라 세계 인식의 틀이라는 점을 다시금 보여준다.
결국 숫자가 없는 언어는 우리가 가진 ‘수는 보편적이다’는 전제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사례이며, 인간 언어와 사고의 관계를 다시 사유하게 만드는 언어학적 전환점이 된다.
결론: 숫자 없는 언어는 가능하며, 사고의 또 다른 방식이다
수 개념이 없는 언어는 존재하며, 그러한 언어들은 해당 문화를 반영하고, 인간 인지의 유연함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다. 피라하어, 문다어, 월프리어리어 등은 숫자 없이도 사람들 간의 의사소통과 공동체 생활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우리가 익숙하게 여겨온 수 개념과 그 언어적 구현이 보편적인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이러한 언어들을 통해 우리는 언어와 사고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문화와 맥락 속에서 유연하게 구성되는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언어는 단지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다. 숫자 없는 언어는 그 창이 다른 방향으로 열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언어의 다양성과 인지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귀중한 인류학적 자산이라 할 수 있다.'언어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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